‘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가복음 2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새 부대에는 새 술이 담기게 마련이다’, 라고. 적어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기술은 예술이 기대고 있는 매체환경을 계속해서 변화시켰고, 그것은 예술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예술을 창작하는 방식, 나아가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꿔왔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적시한 바 있다.
‘새로운 매체’와 그것의 ‘스타’들
모든 세대는 자신들만의 영웅을 갖는다. ‘스타’라고 말해도 좋다. 매체 역시 마찬가지다.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들은 유성영화의 도입과 함께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져갔다. 수많은 청소년들의 밤을 설레게 했던 라디오 DJ들 역시 청춘스타와 아이돌에게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언제나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다.
여기서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도록 하자. 20세기 말, 우리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매체’와 그것의 ‘스타’들을. 하이텔·나우누리·천리안·유니텔… 화려한 동영상도 음악도, 하다못해 사진도 없다. 오로지 텍스트만이 존재하는 공간, 아니 ‘세계’다. 사람들은 이름 대신 아이디를 걸고 글을 올렸고, 역시 아이디를 건 다른 이들의 글을 읽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때까지 알고 있던 글쓰기·읽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었다.
그것은 일기가 아니었다(하지만 일기일 수도 있었다). 친구들과 주고받는 쪽지가 아니었다(하지만 쪽지일 수도 있었다). 그건 소설이나 시가 아니었다(하지만 소설이나 시일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니 그곳은, 기존의 매체를 넘어선 새로운 글쓰기의 공간이었다. 골방에 앉아 자신만의 외로운 작업에 몰두하던 이들을 서로 이어주는 마법의 공간. 그러니 그곳이 문학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고 해두자. 모든 사람들이 독자인 동시에 잠정적인 작가인 세계의 탄생.
물론 그들을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것을 (조금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아우라의 붕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미 ‘부대’는 바뀌었고, 이제는 새로운 술이 채워질 차례였다. 그들은 PC통신으로 얻은 독자들의 열광에 힘입어 고전적 매체인 책을 출간할 수 있었고, 놀라운 상업적 성과를 거두었다.
<퇴마록>의 이우혁, <드래곤 라자>의 이영도,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74’(나우누리 아이디다)…. 한국형 무협과 판타지, 그리고 기존의 장르로는 좀처럼 분류하기 힘든 연애담(아직 ‘인터넷 소설’이라는 편리한 조어는 등장하지 않았다)에 이르기까지 각기 성격이 다른 작품들이다. 특히 <엽기적인 그녀>를 이 자리에 함께 호출하는 것은 <퇴마록>과 <드래곤 라자>에게는 실례가 될 것이다. 팬들에게 돌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품들 사이에도 공통점은 있었다.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을 뿐 아니라, 영화나 게임으로까지 만들어지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사실. 그리고 PC통신이 아니었다면 출간되지 못했거나, 출간됐다 하더라도 빛을 보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PC통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작가들을 통해 척박했던 장르문학의 토양이 일구어진 셈이다.
그래, 귀여니에 열광한 때가 있었지
뒤이어 보급된 인터넷은 더 많은 작가들을 탄생시켰다. 상대적으로 폐쇄적이고 매니악하며 텍스트 중심적이었던 PC통신과는 달리, 인터넷은 링크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인 동시에 이미지와 동영상과 음악이 존재하는 멀티미디어적인 세계였다. 그리고 그곳의 스타는 귀여니를 필두로 한 일군의 ‘인터넷 소설’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이모티콘과 통신체를 사용하며, 황당하면서도 솔직한 이야기를 통해 이제 막 인터넷이라는 신세계를 접한 또래의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귀여니의 소설 중 무려 세 편이 영화화됐고, 몇몇 나라에 번역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는데, 인기가 하락한 것이 문학성 때문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굳이 책이어야 할 필요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세대들에게 친숙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터넷 소설을 보고 싶다면 모니터로 보면 된다. 그 밖의 소소하고 유쾌하고 통쾌하고 짜증나는 온갖 사연들이, 친근하고 낯설고 이상한 이야기들이 그곳에 있었다.
‘고리타분한 사람들의 별난 취미’
신춘문예나 계간지를 통해 등단한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들 또한 새로운 매체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단적인 예로, 장르문학의 문법을 차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김영하와 온갖 대중문화의 잡동사니를 그러모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버무리는 박민규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장르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불과 십 수 년전만 해도 공고하게만 보였던 장르간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매체가 독자들의 감수성을 바꾸어놓았고, 작가들의 창작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터넷 소설’이, ‘칙릿’을 표방한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칙릿을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독자들의 탄생에 일조했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독자들이 없었다면 <달콤한 나의 도시>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부대는 영화와 미드와 예능프로그램과 게임과 음악과 인터넷의 모든 콘텐츠를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마법의 부대다. 일견 문학은 이 부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술처럼 보인다. 텍스트 중심의 블로그조차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사람들은 긴 글을 읽고 쓰는 대신 140자 이내의 단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트위터의 타임라인에 합류하는 편을 택한다. 마치 파도를 타듯 트윗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어느덧 문학은 ‘고리타분한 사람들의 별난 취미’가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ㅋㅋㅋㅋㅋ” 말고 어떤 리뷰가 필요한가
그런데 그 순간,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다. ‘SNS 시인’ 하상욱이다. “서로 가 소흘했는데 / 덕분에 / 소식 듣게 돼”라는 시를 통해 ‘애니팡 시인’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짧은 시를 꾸준히 발표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올 2월에 출간된 첫 시집 <서울 시>가 지금까지 2만 5천부가 팔렸고, 지난 달 출간된 두 번째 시집 또한 5천부 이상 판매됐다고 하니 다른 시집들의 판매부수를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다.
<서울 시>를 잠시 보자. ‘작가 소개’에는 학력·저서 같은 것 대신 작가 사진과 진짜 ‘소’와 ‘개’ 사진이 자리했다. ‘작가의 말’에는 진짜 ‘말(馬)’ 사진이, ‘목차’에는 누군가가 작가의 ‘목을 차는’ 사진 한 장이다. 작가는 시를 SNS에 올리기 전, 모바일 메신저로 “구림?” / “올려” / “ㅇㅋ”의 대화를 통해 여친님께 컨펌(?) 받는다고 고백한다. 그의 시는 철저하게 읽어줄 사람들을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작가가 꼽은 최고의 리뷰는 “ㅋㅋㅋㅋㅋㅋㅋ”였다고 한다.
하상욱의 시가 많은 공감을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SNS 시대에 가장 걸맞은 주제를 가장 걸맞은 공간을 통해서 가장 걸맞은 형식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시는 시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재기 넘치는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가 우리에게 바라는 건, 우리가 그의 시에 기대하는 건 심오한 철학이나 감성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와 공감할 수 있음에 족하다.
분명한 것은, 기술이 너무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둘러싼 매체환경 또한 빠르게 변화한다. 반면 예술의 속도는, 문학의 속도는 너무 느린 것처럼 보인다. 회의적인 이들은 새로운 매체와 함께 구성되는 새로운 세계 속에서 문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마 문학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만 당신이 알던 문학이 아닐 뿐이다.
금 정 연 ㅣ북 칼럼니스트
blur182@hanmail.net
이런저런 매체에 책에 관한 글(90%)과 책에 관한 글이 아닌 글(10%)을 납품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이자 LG 트윈스 팬.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