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제목 저자 출처 학회/발행처
한국광고 100년 | 2013.03.14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광고협회)
I. 발간사 : 110년 이라는 한국 광고산업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자료 II. 통사 : 광복이전과 광복이후로 나눈 한국광고 100년의 변천사 III. 분야별 개관 : 광고주, 광고회사, 매체, 옥외광고, 광고전문지, 카피, 광고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광고사진, 텔레비전광고, 광고연구 및 교육 등 분야별 개관 IV. 시대별 개관 : 구한말시대, 일제시대, 인쇄광고시대, 인쇄전파광고시대, 컬러광고시대의 구분에 따른 시대별 개관 V. 근대광고사 연표 : 근대 광고사의 광고 관련 주요사항과 연표로 구성
공동체 저널리즘을 위해: 김민남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의 삶과 학문 | 2009.09.03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커뮤니케이션 이론 (한국언론학회)
금년 4월 초 필자는 본인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본 학술지의 편집위원장으로부터 단도직입적으로 한 임무를 지시 받았다. 커뮤니케이션이론의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이 저널의 특색 있는 코너인 ‘원로교수 대담’에 이번에는 지역에서 존경을 받는 김민남 교수를 모시기로 결정했다는 사실과 함께 필자가 그 일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다. 우선은 부끄럽게도 김민남 교수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필자가 부산 지역에서 자리를 얻은 것이 2002년이었으니 이때 교수께선 벌써 화갑을 보냈고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전임강사로 정신없이 적응하던 시기에 그 분께선 정년을 앞두어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인터뷰한다는 것이 피상적이고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선 지리적으로 같은 지역에 있고 또 인간적으로 김민남 교수를 잘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의 삶을 조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편집위원장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나서 두 가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김 교수께서 쓰신 책을 구해서 읽어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직계 제자를 찾아 그의 인간적 면모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대체적인 준비가 끝난 어느 날 좌담 일정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게 왠 날벼락이란 말인가! 교수님은 몇 년 전에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후에 증상이 더욱 악화되었고 게다가 이명증까지 겹쳐 도저히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고자 노력했으나 정중한 거절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편집위원장과의 논의 끝에 다소 새로운 형식이지만 김민남 교수에 대한 인물평론으로 ‘원로교수 대담’을 꾸미기로 했다. 기본적인 자료를 구해서 섭렵한 후 어렵게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근처에서 주스 한 박스를 사들고 부경대학교에서 가깝게 위치한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그곳에서 병색이 완연한 초로의 노인이 필자를 어렵게 맞아주셨다.
Speech to5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Society for Journalism and Communication Studies(KSJCS) | 2009.06.24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정보학회)
Today you are are celebrating 50 years of your association. Congratulations. My career as a journalist with news organisations such as the BBC and ITN's Channel 4 News only goes back a little under half of that. But anniversaries are a good moment to think about where we have got to and where we are going. So today I want to use history as a framework for thinking about journalism while also looking to its future. As I am here in Korea with an international audience I also want to put my thoughts into a global perspective.
장 용 교수의 언론법제 연구 성과에 대한 재조명 | 2009.06.17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학회)
언론법제 연구의 경우에는 이전 언론관련 법 규정의 문제점을 다루던 법적인 연구에서 벗어나 미국의 관련 판례들을 분석하고 한국의 언론법제를 비교하는 연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미국적인 언론학 개념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판례를 비교분석하는 연구방법을 언론법 분야에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연구배경을 바탕으로 알 권리에서부터 프라이버시권에 이르기 까지 새로운 연구의 장을 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장 교수의 연구 업적물의 핵심적 내용은 그의 대표 저서인 <언론과 인권>에 모두 담겨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장 교수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성찰은 이 책 을 중심으로 시도하고자 하였다.
곽복산의 신문학 이론 | 2009.06.17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학회)
곽복산 교수의 언론학 교육과 언론학 이론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가 학문적 활동을 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사란 위대한 사람의 전기라고 한 칼라일 (Thomas Carlyle, 1795-1881)의 말과 같이 史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위대한 인물에 관한 연구이다. 여기서 위대한 인물이란 구체적으로 한국의 언론학 역사에 남을 만한 기여를 한 인물을 말 한다. 곽복산은 한국 언론학의 비조임에 틀림없다. 곽복산은 최초로 언론인 양성을 위한 신문학원을 설립했고, 최초로 대학에서 언론학 강좌를 강의했고, 최초로 대학에 언론학 관련 학과를 설립해 최초의 신문학 교수가 되었고, 최초로 언론학 관련 학회 (현 한국언론학회)를 설립했고, 최초로 언론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고, 최초로 언론학개론이란 책을 발간했다.
南玎 김규환과 ‘사회과학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연구’ | 2009.06.17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학회)
한국 언론학의 제도화는 195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54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과가 홍익대학교에 창설되었고, 1958년에는 중앙대학교 신문학과(현 신문방송학부)가 설립되었다.1) 또 1959년에는 牛堂 곽복산을 비롯해 임근수, 최준, 오주환, 장용 등의 주도로 한국신문학회(현 한국언론학회)가 창립되었고, 다음해 4월에는 신문학회의 학술지 신문학보 가 창간되었다. 이 무렵 제도화 초기의 한국 언론학은 신문과 저널리즘 중심의 ‘전통적 신문학’으로 종종 ‘협의의 신문학’으로도 부른다. 전통적 신문학은 독일의 신문학과 미국의 저널리즘 연구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곽복산을 비롯해 한국 언론학의 선구자들은 일본 신문학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 신문학의 뿌리는 독일 신문학에 있었으므로 초기의 한국 언론학은 독일 신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여기에다 해방 후 미국의 영향이 커지는 가운데 특히 1950년대에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단기 교육을 받은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저널리즘 연구가 소개되면서 독일 신문학과 함께 미국의 저널리즘 연구가 초창기 한국 언론학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牛凡李海暢의 언론학과 언론사 연구 | 2009.06.17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학회)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언론학에서 이해창이 갖는 연구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 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1947년 저널리즘 전문 연구잡지 『신문평론』을 창간해 6호까지 당시로서는 가장 오래 발행하여 저널리즘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이고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는 1960년 언론관련 학과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이화여자대학교 신문학과(신문방송학과를 거쳐 현재의 언론홍보영상학부로 명칭 변경)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한국에서 언론학의 초기 제도화에 기여하였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독일 신문학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관련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독일 푸블리찌스틱학을 바탕으로 한 언론학으로서의 신문학개설서를 저술하였다. 넷째, 그는 직접 해외 현지를 방문하여 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열의를 갖고 해외국문지의 변천, 구한국시대 친일지와 민족지와의 갈등 등 기존 연구가 거의 없는 여러 주제의 한국 언론의 역사를 연구하여 선구적인 업적을 내었다. 다섯째, 그는 한국 언론학계에서 처음으로 한국 시사만화의 역사를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개관했다. 월급타면 책을 사고, 연구비 타면 자료 수집을 위한 외국여행을 하던 고집불통의 학자로 기억되는 이해창(장명수, 1990, 4쪽) - 그는 정년퇴직 후에도 연구를 계속해, 자신의 책의 개정증보판을 내며 평생을 연구한 한국 언론학의 대표적인 1세대 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준(崔埈)과 임근수(林根洙)의 언론사 연구 | 2009.06.17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학회)
임근수 언론사 연구의 역사적 의미 임근수는 63세라는 젊은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생애는 언론계와 언론학 교육 및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처음 연구한 구미신문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는 한국 신문학의 체계화와 토착화 작업의 기반이 되었다. 그의 연구는 특수사로서의 신문사를 일반 신문사로, 동양 3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신문사학으로 연구의 초점을 확대 ? 발전시켜 나갔다. 이 글에 주어진 분량의 제한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임근수를 한국 신문학의 선구자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를 한국 언론사 연구에 대한 공헌이라는 점에서 몇 가지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그의 연구가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방대한 구미의 언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 제시하여 이것이 한국 언론사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임근수의 언론사 연구가 이전의 언론사 연구와 차별되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접근하였다는 것이다. 소위, “비교신문사적 연구 방법론이 그것인데, 기존의 연구가 통시적 고찰에 중점을 두었던 것에 비해 임근수 언론사 연구는 공시적 연구, 다시 말하면 세계 속의 그리고 동양 속에 있어서의 한국 신문의 위치와 특질을 밝혀내려는 것이다.”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그의 언론사 연구 초점이 구미에서 동양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특히 이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신문의 구조와 과제, 특히 한국의 신문학 연구와 교육의 문제를 매우 정치하게 정리 ?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점으로 임근수의 주 전공을 신문사학(新聞史學)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라고 사료된다
한국적 기반 소식관형(消息觀型: Information Paradigm)의 원형 - <삼국유사>의 경문대왕 당나귀귀와 <변형>의 미다스왕 당나귀귀 비교에 의한 소식철학(information philosophy)의 모색 - | 2009.06.15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학회)
본론의 전개를 위하여 첫째는 서양에서 “information"으로 규정하는 실재 및 미다스왕의 당나귀귀에 상응하는 명사의 생태구성을 짚어 계보화 한다. 둘째는 information에 상응하는 어휘로 “소식”과 그 계열어를 규정하고 경문대왕의 당나귀귀를 분석하여 한국적 “소식” 관형을 규정한다. 셋째는 경문대왕과 미다스왕의 당나귀귀 사례를 비교하여 상대적 고유성을 재규정하면서 소식철학의 타당성을 모색한다. (* 본 연구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정본은 영어로의 번역본을 택하였기 때문에 번역자에 따라 문장과 어휘 구사가 동일하지 않음을 고려하면서 인용한다.)
한국적 커뮤니케이션 개념의 역사적 이해 - ‘언론’ 유사 개념으로서의 ‘간쟁’에 대한 고찰 | 2009.06.15
광고 역사, 철학 및 인물 | 한국언론학회 봄철정기학술대회 (한국언론학회)
우리 선조들은 요즈음 일상화된 ‘언론’이라는 단어 대신에 ‘간쟁’(諫諍)이라는 단어를 '언론'과 유사 개념으로 삼국시대 초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줄기차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삼국사기』에는 ‘간’(諫)이라는 단어를 26건 36회 사용하고 있는데, ①『삼국사기』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 38년(BC 20년)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②『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온조왕, “十臣諫曰 ...” ③『삼국사기』고구려본기 모본왕 4년 “臣有諫者, 彎弓射之” 등의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 초기부터 ‘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지금까지 이루어진 조선왕조 언론연구는 크게 보아 두 갈래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하나는 대간제도와 조보제도를 필두로 상소제도와 신문고제도, 경연제도, 구언제도 등의 언론제도에 대한 연구이며, 또 다른 하나는 유학자들 예컨대, 정도전, 조광조, 이율곡, 최한기, 정약용 등의 언론사상에 대한 연구였다(김민환, 1996, 21-35쪽). 조선시대까지 ‘언론’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그 다양한 유형이나 기능 및 역할 등을 살펴 볼 수 있는 용례가 드물지만, ‘간쟁’과 연관시켜 살펴볼 여지는 매우 많은 실정이다. 그런점에서 여기서는 언론사상이나 언론제도 연구보다 더욱 기초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용어 즉, ‘언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다양한 용례를 가지고 있는 ‘간쟁’에 초점을 맞추어 그 개념과 유형, 군주의 납간 스타일에 따른 효과, 간쟁 용례 등을 조선시대에 국한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자료 제공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