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행사이므로 우선 광고가 하는 역할, 좋은 광고 제작의 필요성, 광고 제작에 관련되는 도안과 문안, 광고상이 왜 필요하며 어떤 것인가를 길게 설명했다<그림1>. 거의 90년 전 광고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이 광고를 한문과 한글로 게재했는데 아마도 한문을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도 알리려는 뜻이 있었던 듯하다. 행사를 알리는 이 광고는 신문 1면이 아래위로 12단이고 너비는 지금과 같은 37cm이던 무렵 3단 20cm 크기로 실었으므로 무척 큰 사고(社告)인 셈이었다. 하루 신문 발행 면수가 4면 또는 6면이던 시절이었다.
본보에 게재할 현상 도안광고! (本報에 揭載할 懸賞圖案廣告!)
래(來) 십일월 십삼일부터
동(동) 십오일까지 삼 일간
긴 설명 다음에는 ‘도안광고 투표모집(圖案廣告投票募集)’과 ‘투표 규정(投票規定)’, ‘추첨과 시상(抽籤과 施賞)’ 내용이 나와 있다.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이라던 예고와는 달리 실지는 13일 하루에 끝났는데 아마도 예상했던 만큼 참가 기업이 많지 않았던 듯싶다. 드디어 11월 13일(토요일)에 거의 1면 반에 걸쳐 45개의 꼭 같은 크기의 광고가 4면과 5면에 게재되었다<그림2>. ‘현상도안광고(懸賞圖案廣告)’라는 꺼먼 바탕에 흰 글자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4면에는 다시 도안광고와 투표에 대한 주의를 설명했다. 5면 가운데에는 투표 규정과 추첨과 시상을 다시 설명했다.
모름지기 많은 독자는 놀랐을 것이다. 매일 신문 지면에 광고가 게재되기는 했으나 이렇듯 많은 광고가 꼭 같은 크기로 지면 전체에 실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수준으로 보아서는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훌륭한 광고였기 때문이다. 2주 남짓이 지난 11월 30일에 수상작 발표가 나왔다<그림3>. 제법 큰 기사로 다룬 이 발표에 의하면 1등이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 2등은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 3등은 화평당(和平堂) 제약회사였다. 총 투표수는 13,500표인데 1등 득표가 1,476표, 2등 434표, 3등 308표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3개 입상작이 모두 한국 기업으로, 45개 출품회사 가운데 일본회사가 23개사였으므로 일방적인 한국 편들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등 경성방직 제품은 광목이었는데 브랜드는 ‘태극성’으로 태극 마크가 들어 있다<그림4>. 돈이 들기는 했으나 기계로 만든 광목은 겨울철 아낙네들을 무명을 짜던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켰다. 동아부인상회는 와이셔츠, 장갑, 목도리, 내의, 재킷 등을 팔았고 화평당은 여성용 태양조경화(胎養調經丸)라는 ‘아기 낳는 약’이었다. 이 두 광고에는 모두 서양 영향이 나타나는데 동아부인상회의 배경 일러스트레이션은 양장한 남녀가 서양식 울타리 길을 걷는 실루엣을 사용하고 있으며<그림5>, 태양조경환은 알약을 받치고 있는 날개 달린 천사의 그림과 두 어린 천사가 보인다<그림6>.
수상한 세 회사에 대해서는 푸짐한 보상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12월 7일에 이 3개사의 PR 특집이 신문 전면에 게재되었다<그림7>. 수상작을 제작한 사람들에게는 1등 축음기 한 대와 레코드판 10매, 2등은 회중시계 등이었다. 이 수상회사 PR 특집에는 1920년대 중반의 한국 광고 상황을 이해하는데 재미있는 기사가 맨 위에 나오는데 한글로 썼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도안광고(圖案廣告).
조선 상업광고술이 아직 유치하여 자력(資力.
즉 광고비)은 다른 나라 사람의 광고와 마찬가지를
들이면서도 효과는 그만큼 얻지 못하는 것이
현재 우리 조선의 현상이며 또한 광고가 상품
판매에 얼마나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치 못하는 이가 많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
한국 최초의 광고상은 1회로 끝났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참여하는 회사가 적은 것이 그 원인이었을 것인데 앞서 언급한대로 45개사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일본회사는 하나도 수상하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원인의 일부를 짐작할 수 있다.
경성방직이 1등을 받은 것은 그 브랜드가 ‘태극성’이어서 한국인의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광고상이 있기 6년 전에는 3.1독립운동이 있었는데 많은 한국인의 기억에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것이며 반일감정으로 남아 있었을 수 있다.
겨우 한 번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신문이 하루에 4~6면 발행이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이미 1920년대에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은 대담한 기획이었으며 또한 높이 사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동아일보가 다시 상업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광고 크리에이티브를 기준으로 하는 광고상을 주최한 것은 1930년대 말 무렵이었다. 동아일보가 1974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 이른바 ‘동아광고사태’를 겪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AD History] 1926년 11월 13일 한국 최초의 광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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